2024
경화에게:
알면서도 우리는
두 번째 편지

주리에게

주리이, 안녕. 매번 이름을 부를 때 주리이 하고 길게 부르게 돼요. 주리 님,은 주리 니임, 하고요. 요즘 서울은 봄눈이 잦아요. 날이 포근하다가 비가 내리고, 밤이 오면 곧 눈이 되지요. 저는 오래전에 사둔 숙우와 잔을 꺼내어 차를 우려낸 참이에요. 책상 옆 스탠드에는 주리에게 준 것과 같은 새가 달린 모빌을 걸어놓아서 제가 몸을 트면 살랑, 살랑, 흔들리네요.

다섯 살쯤이었나 전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설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저희 가족과 이모네 가족이 카니발 한 대를 타고 이동했죠. 깊은 밤이 왔고, 운전하는 아버지를 빼고는 모두가 잠들어 있었어요. 카니발 맨 뒤 오른쪽 자리에 앉은 저를 제외하고요. 저는 겁을 먹었다가 스스로 다독이기를 반복하고 있었어요. 이 야심한 산길을 건너는 차는 우리뿐인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우리 가족을 잡아먹으면 어떡하지 하면서요. (어렸을 때 밤에 차를 타고 산을 넘을 때면 이 생각 진짜 많이 했네요.) 창밖은 검은 나무들이 사선으로 번지며 빠르게 지나가고, 전 그 끝없는 풍경을 한참 바라 보다가, 왜 살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일순 아무도 곁에 없고, 나만 태운 자동차가 영영 밤의 산길을 달릴 것만 같은 느낌. 삶은 창 너머 보이는 밤의 숲처럼 깜깜하고, 나는 혼자이고 혼자일 것이라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예감 같은 것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든 것 같아요. 집에 도착해 차 문을 열고 땅에 발을 디딜 때 붕 떠 있는 것 같던 게 기억나요. 부스스한 가족의 얼굴들이 너무 낯설었던 것도요.

학창 시절엔 창가 자리를 아주 좋아했는데, 제일은 맨 앞줄이었어요. 거기가 선생님 몰래 바깥을 보기 용이하거든요. 교실에서 내다보는 창밖에는, 쏟아지는 햇빛 아래 저마다 공을 향해 달리거나 운동장 테두리에 앉아 재잘거리는 모습이 있었죠. 열어둔 창문 안으로 훅 끼쳐오던 흙먼지 냄새와 웃음소리. 그 생동감이 도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전 같은 의문을 가졌어요. 왜 살까, 어쩌려고 살아서 여기 앉아 있을까. 물론 금세 일상으로 돌아왔지만은, 바로 연필을 쥐고 문제를 풀었지만은, 멈추지 않는 밤의 차를 혼자 타고 있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어요. 한여름에도 이따금 몸은 선득선득해졌어요.

왜를 묻다가 커서는 조금 멀리 가보았어요. 한 번은 나흘간 기차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는데, 군데군데 녹슬어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기차에는 세 칸으로 된 침대가 마주 놓여 있었지요. 건너편 가족은 한 칸의 침대를 둘이서도 쓰고 셋이서도 쓰고, 사람이 지나다녀야 할 통로는 짐으로 가득했어요. 며칠 씻지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그 비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어찌나 잠이 쏟아지던지, 낮이고 밤이고 내내 잠에 취해 있었어요. 그러다 잠깐 정신이 들었고 담배를 피우러 객차 간 공간으로 나섰는데 눈앞에, 태어나 처음이고 아마도 마지막일 생경한 풍경이 있었어요. 긴 지평선 아래로 나무와 꽃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라 있고, 그 사이로 좁다란 오솔길이 나 있었지요. 홀릴 듯 아름다워, 하마터면 그대로 내릴 뻔했어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왠지 그 오솔길 끝에는 천국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이내 기차는 그곳을 지나쳤고, 슬픈 의문은 다시 떠오르고 저는 선득해졌지요.

지금 감기 기운이 좀 있는데 몽롱한 채로 적다 보니까, 둘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대신 마침내 혼자 차게 식었답니다,로 끝맺는 이야기 모음 같네요. 김빠지죠. 미안해요. 어린 날 검은 산속에서 느꼈던 쓸쓸함이, 진실에 가까웠다는 생각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하게 되었고, 저는 그게 좋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 모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삶은 어둠으로 수렴된다는 것, 살아갈 분명한 이유는 사실 없다는 것이 혼란에 빠진 중마다 저를 명징하게 해주었어요.

주리 님, 모두들 알면서도 사랑을 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참 놀라워요. 며칠 전 붕어빵을 사 먹으며 주리를 생각했어요. 정확하게는 주리가 생각나서 붕어빵 가게를 찾았어요. 팥으로만 골랐는데, 주리가 오면 슈크림도 살게요. 약을 먹었더니 열이 내리고 있어요. 맑은 정신엔 보내기 부끄러워질 것 같으니 열이 더 떨어지기 전에 그만할게요. 횡설수설한 말들은 잘 걸러서 보아주세요.

이름을 길게 부르고 싶은 주리-에게.
경화가.